년대 문학계에서 대두된 ‘순수와 참여’에 관한 논의는 현실참여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사실주의 예술경향을 낳게 된다. 이러한 격변하는 사회적 문화적 흐름 속에서 국내 화단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을까? 해방이후 국내 화단은 크게 두 가지의 흐름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 시대의 선전에서부
한국의 채색화는 '상남폄북론'의 영향과 일제 시대 일본화의 영향으로 전통 회화로서의 위치를 갖지 못하고 한국화단에서 소외되었다.
1940년대 초반에 걸쳐 동양화 부분은 일본화의 감각적 정취라는 대세에 의해 묵법에 바탕을 둔 사경산수에도 일본 남화의 영향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유
화단을 장식하였다. 1952년부터 개최된 국전은 한국 미술을 정착시키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였는데, 류경채, 김창락, 장리석, 임직순 등이 활약하였다.
조소 활동은 김복진, 김종영, 김경승, 윤효중 등이 선전을 무대로 하여 발표하였다. 1950년 이후는 국전을 무대로 다양한 재료의 사용과 추상풍의 철조
한국적’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1. 팝아트의 정의
팝아트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소비문화의 대중미술이다.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화단을 지배했던 구상회화의 한 경향이지만, 정작 그 시작은 영국이다. 미국의 대중문화에 매혹되어 있던 미
해방이후 한국화는 정체성과 현대성이라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편 1960년대 초반은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굳이 4․19를 들지 않더라도 당시 우리나라 현대사가 겪고 있을 변화의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이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의 화단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서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