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ity)은 편협한 신앙, 종교적 박해, 미신들과 본래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성적인 기독교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고 믿었다.(Voltaire는 마지막 성직자의 필연적 결과로 죄여진 마지막 왕을 보고싶어 했다)
우리가 Rauschenbusch를 이성적 초자연론자보다 더 자유분방하고, 반 기독교 교리자들보다 덜 회
약속된 구원은 신자들에게 있어 단지 미래의 가능성인가? 아니면 신자들의 현재의 경험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완전한 성취는 미래에 있고 현재는 어느 정도 부분적인 성취만을 누리는 것인가? 이는 신자들의 현재적인 경험과 미래의 희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근본적인 종교적 질문이다.
▶비판
- 고후 2:4절의 문맥을 보면 눈물로 편지를 쓴 이유는 고린도교회내에 사도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인것을 볼수있다. 하지만 고후 10-13장의 편지를 쓴이유는 다수의 사람때문인것을 볼수있다. 즉 전제가 다르다는 것이다. 한사람을 전제로, 다수를 전제로
- 고후 1-9장과 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