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 고왕)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함께 요서 지방의 영주(營州)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3. 건국기의 대외관계
발해는 7세기 후반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던 까닭에 건국 초기부터 돌궐, 신라는 물론 적대국인 당과도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전개하여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고 대내체제의 안정을 기하였다.
가. 돌궐과의 외교적 교섭
발해
발해에 대한 견해가 모호하다면 우리는 고조선 , 부여, 고구려, 발해로 계승하여 내려오면서 우리 조상들이 근 2천년간 동북아시아의 큰 모퉁이를 차지하고 찬란히 이룩하여 놓은 민족 문화의 오랜 연원을 충분히 파악할 수도 없으며 또 발해왕조가 멸망한 이후에도 그 후 수백 년 간이나 줄기차게 계속
925년부터 고려로 망명하는 발해인들이 증가하였다.
이런 시기에 발해의 중앙정부는 강력한 요나라의 등장으로 국가 존립이 위험에 처하자,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고려와 정략적 혼인을 하는등 외교적으로 노력을 하지만 막상 요의 침공때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였다.
919년 요나라는 발해의
1. 문제제기
과거 오랫동안 우리의 역사로 인식되지 못했던 발해, 아직도 국제적으로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인지, 말갈인의 나라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부 몰지각한 국제 역사가들의 논쟁일 뿐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Ⅰ. 머리말
발해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아스라이 떠오르는 옛 추억과 같은 것이면서도 무언가 잘 잡히지 않는 존재가 아닌가. 발해는 고구려 옛 장수였던 대조영이 세운 나라였고, 그것은 엄연히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배워왔으면서도, 사실은 우리에게 잊혀진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서로 생각하고 느끼는 건 다르겠지만 우리 역사에 관한 견해는 거의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과연 그럴지 북한은 우리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있으며,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지 이제부터 알아보기 위해 우리의 수많은 역사들 중 난 발해사를 꺼내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본문내용
발해사 연구가 한국사 연구분야 중에서 가장 부진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물론 문헌자료의 부족이 발해사 연구부진의 기본적 취약점이 되고 있어 발해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고사하고 문헌자료에 대한 깊이있는 검증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않는 실정이다. 이런 상태에서 발해사가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