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노계 박인로의 개요
1. 출생
1561(명종 16)~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는 무인(武人)으로도 활약하였다. 본관은 밀양이다.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이다.
영양 도천리(永陽 道川里 :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군 북안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조는
③업적인정(김춘추와 김유신)
ㄱ.김춘추(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604~661])
신라 제29대 왕으로 김유신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고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의 율령제도를 모방한 관료체계를 정비하고 구
서당이라는 9개 군단(軍團)을 설치하는 등 왕권을
확립하였다.
ㄴ.김유
2-1.광해군 일기의 제작과정
◎1623년 이수광 등이 광해군대의 시정기가 대북파에 의해 작성되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수정할 것을 제의 → 열악한 재정으로 인하여 곧바로 실행되지 못함.
◎1624년 이괄의 난으로 광해군대의 시정기와 승정원일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음.
◎소실로 인한 자료
Ⅰ. 조선시대의 왕권
조선시대의 관료는 문관과 무관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그 밑에 행정실무자인 관리들이 있었다. 문관과 무관은 정책입안자층인 양반이었고, 기술관․서리․향리 등은 행정실무자층인 중인이었다. 문관․무관 중에서도 정치를 주도하는 관료들은 문관이었다. 조선 왕조
선조가 역사에 무지했더라면 수도 없이 일어났 던 내부의 분쟁과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고 더 나은 국가로 전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가 그리도 중요한 것이라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우리의 선조들이 당대의 사건에서 얻은 교훈을 자신들만 아는
1. 임진왜란, 그 혼란기의 광해군과 인목대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조선의 왕은 14대 임금인 선조였다. 선조의 즉위는 16세기 초반 이래 지속되어온 훈구와 외척들의 척신 정치가 끝나고, 척신정치 시절 박해를 받았던 사림파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면서 바야흐로 정치판이 물갈이를
고려 말엽까지 우리 감정과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우리 고유의 글자를 가지지 못하였지 때문에 한자를 빌어 쓰거나 한시문 형태로 표기하였다. 조선 초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까지는 빌어 쓴 글과 한문 글이 공존하였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이후 나라글자가 실용화되기 시작한 이후의 조선
Ⅰ. 관왕묘의 개념
관왕묘(關王帝)는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관제묘(關帝廟), 관성묘(關聖廟) 또는 무묘(武廟)라고 한다. 관우(武安王 雲長 關羽, ? ~219)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장수로 관성제군(關聖帝君) ․ 관보살(關菩薩)이라고 하며, 무운(武運)과 재운(財運)의 수호신으로서 한족(漢族)의
Ⅱ. 월인석보 분석
1. 월인석보(月印釋譜)
[월인석보]는 원본이 완전히 전해지지 않아 당초 몇 권으로 되어 있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총 24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서 모두 12권이 현재 전해진다. 세종 말엽에 시작하여 세조 초엽에 간행되기까지 13년 정도 걸렸다. 석가일대기의 결정
선조(宣祖)에 대해 재평가하는 일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우리가 보통 선조를 떠올리는 이미지는 ‘임진왜란 발발에 책임이 있는 무능력한 군주’, ‘서울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임금’, ‘국난 극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성웅 이순신에 대해 시기하는 임금’ 등의 부정적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