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곽
Ⅰ. 들어가며
1. 한국의 성곽
우리의 성곽은 언제부터 축조되기 시작하였는지는 연구된 성과가 미흡하여 정확히 언급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료에 의하면 울주 검단리 유적은 기원전 3~4세기 이전에 마련된 주거단지로 외부를 타원형 형태로 둘린 집단방어시설이 있는데 이것이 최초
시설이라 할 수 있다.
전형적인 성곽은 네모꼴로 쌓은 성과 다시 그 밖으로 네모꼴로 쌓은 곽으로 구성되는 이중벽의 형식을 띤다. 이때 안쪽의 것을 城 또는 內城이라 하고 바깥쪽의 것을 郭 또는 外城이라 한다. 그리고 성곽은 지형적인 조건과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 발달하게 되며 특
Ⅱ. 화성
1. 화성의 역사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고 불리는 화성은 1794년부터 2년 반 걸려 1796년 완성되었다. 정조 때였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세도세자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품고 있던 정조는 아버지 묘를 명당의 자리로 모시는 것이 염원이었다. 마침 후보지로 수원 고을 뒷산(지금의 화산)이
수원 화성이 축조된 18세기는 조선왕조의 사회전반이 중세의 틀을 벗어나 근대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당연히 화성의 축성에도 그러한 시대의 흐름이 작용하였다. 비단 성곽의 시설뿐만 아니라 축성방식과 행궁을 비롯한 도시시설과 가로(街路)의 설계와 같은 도시기본 개념에
성곽이 아니듯 부분적으로는 자연지세를 그대로 이용하더라도 일정공간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조성하든가 인공구조물을 쌓아 상호 연결시켜 방어력을 제공하는 구조물이어야 한다.
전통 건조물이란 종전까지는 성곽이 당시에 필요한 군사방어시설물 이었으나 현재는 그 기능이 끝나고 단순히
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
성곽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른 시기에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축조되었는데 후대에도 석재를 구하기 힘든 지방에서는 토성이 축조되었다. 성(城)이라는 글자 자체가 ‘흙으로 이루었다’는 뜻인데 앞의 흙을 파서 뒤에다 쌓으면 성의 높이가 더 올라가는 효과를 주게 되고 흙을 판 곳에 물을 채우면
성곽(성)의 개념
성곽이란 군사적 행정적인 집단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거주하면서 일정한 공동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전통 건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적인 재해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인위적인 시설
시설물이다. 그 밖에 국경과 요새지에 쌓은 행성이 있다.
1) 시기별 성곽과 특징과 변화
신라의 축성은 총 4시기로 나눌 수 있다.
1시기는 건국기의 축성(기원 전후)으로 신라가 수도인 경주에 도성을 쌓고 주변지역에 성곽을 축조하여 초기적 방어태세를 하고 있다.
2시기는 성립﹘발전기의
역사학적,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성곽의 기원은 대체로 기원전 1~2세기 경 고지성집락(높은 지대에 위치한 집단 거주지)에 설치한 방어 시설, 즉 둑이나 환호(環壕 : 외부의 짐승과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집단 주거지 둘레에 판 좁고 긴 도랑 형태)에서 비롯되었으며 정복 사업이 본격화하는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