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로 복귀하여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까지 오르는 등 7년간은 전생애를 통한 황금기였다. 그러나 변덕쟁이 임금인 숙종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세우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당한다. 유배지에서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쓴 것이 사씨남정기다. 이러한 와중에 그의
참의로 복귀하여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까지 오르는 등 7년간은 전 생애를 통한 황금기였다. 그러나 변덕쟁이 임금인 숙종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세우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당한다. 유배지에서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쓴 것이 '사씨남정기'다. 이러한 와중에 그
장령이라는 벼슬을 특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위기가 이미 극에 달하여 이를 담당할 재기가 아님을 주장하고 사양하였다. 고종은 다시 순흥부사를 제수하였지만 이 역시 받지 않았고 그후 정3품 통정대부 비서승, 중추원 참의등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첩지를 펴보지도 않고 서재만을 지켰다.
맹자」의 벽이단에 근거한 것으로서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하여 심에 대한 정의 즉 심설에 대하여 학파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이를 심설논쟁이라고 한다. 그 심설 논쟁 중에 율곡, 송시열과 낙론을 계승하는 간재 전우과 노사 기정진학파도 있었다. <흐름으로 읽는 동양철학> 이종우 p. 155~156참조
2. 노사
참의, 승지를 역임하고 양주목사로 나갔다.
현종 때는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을 빼고는 전 참판을 지냈으며 잠시 외직으로 경상·경기감사로 나갔다가 형조판서에 올랐다.
1680년(숙종 6)부터 좌참찬 · 예문관제학을 역임하고 1689년 소의장씨(昭儀張氏)가 왕자를 낳아 숙종이 그를 원자로 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