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功)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이에 김순명(金順命)曰, “충청도의 인심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선조曰, “마음은 순박한데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하니,
이원익曰, “원균에게는 군사를 미리 주어서는 안 되고, 전투
戰功)을 세웠고,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
. 통일 전에는 전공(戰功)에 따라 지급된 식읍(食邑)과 관복무의 대가로 받은 녹읍제가 발전하였고, 능위전(陵位田)․사전(寺田) 등이 있었다. 통일 후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신문왕 때에 녹읍을 폐지하고(689), 수조권(收租權)만 인정하는 직전(職田:官僚田)과 세조(歲租)를 주는 제도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