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주장하는 등 새로운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였고, 이후 중화민국이 세워지는데 기초가 되는 등 역사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분할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국을 구하고자했던 변법운동의 태동을 살펴보면서 운동의 구심점에 서 있었던 강유위를 중심으로 무술정변 이전 그의 변법사상, 이론적
개혁이 없이는 자강‧부강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팽배하게 되었다. 즉 중체서용론에 수정을 가하여 의회제도를 근원으로 하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장점을 君民共治라는 차원에서 채택하여야 한다는 변법사상이 호응을 얻었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이러한 변법사상을 기초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변법자강운동의 첫 출발이었다. 이때 강유위와 함께 개혁을 주장한 인물중 하나가 양계초였다. 그는 1873년 광동의 하층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했던 그는 강유위가 운영하던 학당에서 개혁사상을 키웠다. 이로서 강유위는 양계초라는 든든한 협력자를 구할 수 있게 됐다. 양계초
된 데에는 근대 서구의 영향에 유래하는 公理公法 관념의 형성이 결정적 작용을 한 것이라 생각된다. 1880년대 중엽 이래 강유위의 공리공법 관념은 이른바 “幾何공리”로 표현된 자연과학적 법칙, 공중의 이익이라는 근대 인도주의 및 다수자의 公論 존중이라는 서구적 사고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끌어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청조의 지위를 튼튼히 하고 자신의 위신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1901년부터 유신의 기치를 내걸고 신정을 실시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 변법은 입헌군주제를 지향하였던 강유위의 변법과는 분명한 경계를 그었다. 즉 ‘유신이 극에 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