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전 미국의 국공합작을 추진을 이용하여 미국의 협력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하여, 격국 소련의 협조 아래 소련식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발전모델로 채택하였다. 이처럼 중국은 미국 등 서방의 봉쇄와 소련의 견제로 열악하였다.
모택동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하
‘호조조’ 운동을 전개하였다. ‘호조조’는 2~4호의 농가가 파종기나 수확기등에 상호간의 노동력을 서로 교환하여 돕는 것으로 동양의 전통적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품앗이와 같은 것이다. 토지와 농기구, 가축 등 생산수단은 모두 개인이 소유하였으며 생산 역시 국가의 계획에 따르지 않았다.
지주소유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이 혼란한 민심을 얻는 길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중국의 공업화 수준이 아직 낮은 농업국가에 속하는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동력이 부족하다는 판단 하에 ‘신민주주의’를 일부 도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의 전통적인 생산체제는 산업혁명을 통해 이룩한 서유럽의 대량생산체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상품경제의 측면에서 본다면 중국은 20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반식민지 상태로 잔존해 있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공내전(國共內戰)의 승리를 통해 인민민주주의국가로서 성
중국 사회경제구조가 안고 있는 모순을 점차 인식하여, 그들이 대중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중국정치가 노동계급의 요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지는 않았으나 노동계급은 국가의 형성과 발전에 예외적으로 중요한 세력이었다. 당시 중국 전체인구 4억명 중에서 노동계급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