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왕 제이착욕함해건녕왕
?? [ch?’?r] 황태자(皇太子)
陷害 [xi?nh?i] ① 모함하다 ② 모해하다
장양제는 총애를 믿고 교만이 생겨 마침내 2,3살 소아를 장래 황태자로 삼으려고 첫째 광평함을 모함하고 둘째 건녕왕을 모해하였다.
府司馬李輔國,本是飛龍廐中的?奴,以狡猾得幸,及見良?專寵,復
1. 직계표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1대 광평대군
2대 영성군
3대 남평군
4대 임정부정
5대 자길
6대 광춘
7대 현
8대 치환
9대 동노
10대 상회
11대 자기
12대 유탄
13대 인재
14대 준형
15대 장연
16대 인성
17대 태하
18대 범은
19대 성종
20대 나(이단비)
항렬자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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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가 더 많아져 수백명 즈음은 보통이었다. 품계가 높은 판서나 정승 급의 고관대작이면 1천 명을 넘기기 어렵지 않았다. 왕족으로 올라가면 아마도 수천명이었을 것이다. 알려진 최대 규모는 세종의 제5왕자인 광평대군, 제 8왕자인 영응대군이다. 이 두 왕자의 노비는 각각 1만을 넘었다고 한다.
1. 유성룡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柳仲郢,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이다. 1558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가
정성을 다해 길렀다. 세종과 문종이 죽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내명부의 어른으로서 국상중에 단종의 가례를 명령하여 성사시켰고, 수양대군과 대립하면서 단종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난 뒤인 1455년 6월에 가산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가 같은해 11월에 교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