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교회와 로마 천주교회의 교리, 예배, 교회 정부 형태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였던 것이었다. 오덕교, 장로교회사,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6. 208-224.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장로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만든 이 교리들을 신봉하고 있다.
영국의 기독교가 점차 침체로 빠져서
교회당과 1582년에 아즈찌에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영주들의 힘에 의하여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약 30년 후인 1582년에는 신도 수 15만 여명, 교회당은 200여개, 선교사는 59명에 달하였고 1590년대의 신도 수는 당시 일본 총인구의 1.3%인 30여 만 명이나 되었다. 이 중에서도 진정한 가톨릭으로의 개종
- 정치적 배경 : 당시 분위기는 개신교 쪽으로 흘렀으나 종
교대립을 막기 위해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Via Media) <종교 통합, 왕권강화>
오늘에 이르기 까지 성공회는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의 영
향을 받았으나, 신앙은 초대 교회의 것을 따르고 있다.
01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독립된 자아를 찾다_ 예루살렘의 멸망(70년)
주후 60년에 로마의 강압 통치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 로마의 우산 아래 보호받고 있었던 그리스계 주민, 상인, 제국의 관료들과 유대인들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로마는 자주 성전 보물창고를 약탈하여 미
영국으로 신대륙으로 망명했다. 신자들은 비밀리에 건물이 아닌 야외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이를 광야교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온갖 탄압을 이겨내면서 스위스 로잔에 망명 신학교를 세우고, 목회자들을 길러서 프랑스 내에 개혁파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청교도라고 불리는 잉글랜드의 칼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