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쟁의 발단
조선 후기 노론계통의 학자들 사이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벌였던 논쟁(人物性同異)에 관한 논쟁으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지방에 거주하였고,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의 견해에 동
낙론으로 분립되어, 충청도 지방 학자 중심의 호론은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고 서울 지방 학자 중심의 낙론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였다. 호론의 논리는 아와 비아를 구분하는 논리로 기존의 화이론적 사유체계를 계속 유지해나가는 근
낙론계열에 속한다. 특히 연암의 숙부 박사근(朴師近)이 낙론의 일거두(一巨頭)였던 박필주(朴弼周)의 양자가 된, 고무가 김창협의 고제(高弟) 어유봉(魚有鳳, 1672~1744)의 집안으로 출가하였으며, 그 자신은 어유봉의 고제이며 사위인 유안재(遺安齋) 이보천(李輔天, 1714~1777)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연
낙론 계열이었으므로 이들의 이론을 낙론이라고도 한다. 한편 한원진의 이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병계 윤봉구, 매봉 최징후, 봉암 채지홍 등 주로 충청도 근방에 살았기 때문에 호론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이들 사이의 논쟁은 ‘인물성동이론’이라는 명칭 이외에 ‘호락논쟁’이라는 이름으로도
낙론의 견해를 비교분석한 후, 조선 후기 사회사상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써 볼 것이다. 이는 조선의 기본 인식이었던 성리학의 이론 세계의 특성을 알게 되는 것 뿐 아니라 그 당시 사회 상황과 조선 선비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2. 본론
1) 논쟁의 발단
인물성이론을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