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여행을 다녀온 시기, 제 3기는 관직에 진출하여 과거의 반항적 생활에서 벗어나 세상과 타협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천에 옮겨보려했던 시기로 설명할 수 있다.그가 안의현감 생활을 하면서 쓴 열하일기와 면천군수 시절에 남긴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안설등은 연암의 현실 개혁사상을 이론
연구하고자 한 고증학(考證學)이 발전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조선의 지배층은 성리학을 교조적(敎條的)으로 만들어 주자의 비판자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탄압하는 등 성리학적 사상에 입각한 사상 통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민족의 생활을 지리멸렬로 만든 것은 위에서 언급한
일기(燕行日記)』가 전하고 있으며 이 체험과 관련된 시조 1수도 발견되고 있어 흥미롭다. 이 세 작품의 실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 봉황성(鳳凰城) 돌아들어 고향 어디메오./ 팔도하(八渡河) 가에 갈잎에 자리 보아/ 삼경(三更)에 겨우 든 잠을 여울 소리에 깨과라.
⒝ 난하(ଽ
것을 말한다.
대체로 18세기 이후 실학의 흐름은 이익으로 대표되는 경세치용학파와 박지원·박제가·홍대용으로 대표되는 이용후생학파 및 완당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룩하게 된 실사구시학파로 대별된다. 그러나 이 세 유파가 제각기 학문분야를 달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념과 방법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