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에 패배하여 삭직되는 등 임란을 체험한 윤국형은 문소만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임진년 난리 후로 백성들이 모두 떠나고 흩어져서, 비록 대가세족이라도 모두 생업을 잃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으며, 여자들은 높고 낮은 사람을 가릴 것 없이 적들의 손에 몸을 더럽힌 자가 몹시 많았다. 이
5. 평양성의 탈환과 강화
1) 평양전투와 벽제관전투, 행주전투
1592년 12월 25일 제독 이여송은 군사 3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1593년 1월 5일 무렵에는 평양에서 가까운 평안남도 순안에 주둔하였다. 1월 6일, 약 8천의 조선군사와 함께 이여송의 군대는 평양성을 포위했다. 2천의 의승군
벽제관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치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일단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많은 군대를 파병하였으며, 곡식 역시 지원하였다. 그리고 군대유지를 위해 막대한 은을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국에서 벌어지는 전쟁도 아니었기에 수송까지 해야 했으니, 명나라는 이 상황이 달가울리 없었다. 게다가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겨우 목숨만 구해온 이후,
명군은 처음 요동유격 사유, 부총병 조승훈이 이끄는 3,500명이 들어오자마자 평양을 공격하였다. 물론 요동군은 일본에 의해 참패하였지만, 일본군은 명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는 일본이 북진을 완전히 접는 이유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군이 평양 이북으로 진군할 여력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