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론(청을 정벌하자는 논의)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이 북벌론은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효종으로 즉위하면서부터(1649년) 북벌계획으로 확정되어 본격화되었다.
효종은 즉위 후에 반청 척화파 계열의 인물을 등용하고 송시열의 적극적인 보좌를 받으며 설욕을 위한 본격적인 북벌계획을 준비하였
1) 명의 쇠퇴와 여진족의 흥기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금나라가 몽고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후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은 명과 조선에 대하여 이중적인 종속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명대의 여진족은 건주, 해서, 야인 여진의 셋으로 갈라져 있었다. 명나
북벌과 북한산성의 증축
a. 증축 과정
이후 효종은 임진왜란 때 도성을 적에게 내어준 것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다가 치욕적인 항복을 당한 역사에서 북벌계획을 구상하였으나, 그가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 그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숙종 즉위년(1674)에 북한산성을 축성
조선은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를 지킬 것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을 것
왕의 장자 및 제2자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명나라 예에 따라 사절을 보낼 것
출병 요청에 임할 것
청군이 귀환할 때 병선(兵船) 50척을 제공할 것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
북벌의 필요성을 역설해 온 장개석은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한 ‘정군숙당준기북벌안[整軍肅黨準期北伐案]’에서 국민군과의 연합, 손전방군의 중립화, 호남 ․ 강서 군사세력과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내용으로 하는 북벌 작전계획을 건의하였다. 북벌의 준비가 진행되어가면서 5월 31일에는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