邪學에 물들어 있다고 고발하였다. 홍낙안의 편지에는 확인된 사실 보도도 있었지만, 확인되지 않은 뜬소문도 과장되게 기록되어 있었다.
폐제사 문제로 양반사회는 크게 동요되었다. 조선인들이 위패를 중요시한 문화적 관습은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에 대해 류대영,『한국 근
예학을 통하여 본 천주교, 개신교의 지방별 복음수용
1. 서론
우리나라에 儒學이 들어오면서 畿湖지방(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과 嶺南지방(경상도)은 다른 해석을 하여 기호지방에서는 율곡을 중심으로, 영남에서는 퇴계를 중심으로 하는 학파가 형성된다 儒學의 分派는 李滉, 曺植학파를 중심
邪學이라 칭한다.
하였고,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사회적 냉대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천주교신자를 조선사회는 邪學罪人 조선에서 사학죄인이라 직접 거론하는 것은 언제쯤인지 확실치 않다. 다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를 토대로 보면, 사학죄인이 제일 처음 거론된 것은 정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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