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희곡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조수로서의 작업에 불과했지만, 점차 그의 작품이라 할 만한 희곡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3부작 역사극 《헨리 6세(1590∼92)》를 그의 처녀작이라 볼 수 있다. 그 속편에 해당하는 역사극 《리처드 3세(1593)》는 엘리자베스 1세 때 영국에 많은 영향을 준 요
의해서 허물어지는 과정을 그린 <오셀로>, 늙은 왕의 세 딸에 대한 애정의 시험이라는 설화적 모티브를 깐<리어왕>, 권력의 야망에 이끌린 한 무장의 왕위 찬탈 과정과 그것이 초래하는 비극적 결말을 그린<맥베스> 4작품으로 세익스피어의 문학의 절정이자 세계문학의 금자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런던으로 나온 시기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1580년대 후반일 것으로 생각되며, 상경의 동기가 극단과 어떤 관계였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으나, 1592년에는 이미 그가 유수한 극작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선배 극작가인 R.그린의 질투어린 비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590년을 전후한 시대는 엘리자베스
셰익스피어'라고 불리었지만 인간심리의 통찰에는 깊은 안목을 가졌고, 완성과정에 있던 근대영어의 잠재력을 극도로 발휘하여 시극미의 최고를 창조했다.
그의 희곡은 총 36편이며 시집은 3권을 남겨 극시인으로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며, 영국이 식민지를 모두 포기한다 해도 셰익스피어를 지킨
있다. 1592년부터 3년에 걸쳐 런던에 유행한 페스트 때문에 극장은 폐쇄된 이후부터 본격적인 극작활동에 들어간 셰익스피어는 <로미와 줄리엣>, <한여름 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십이야>, <줄리어스 시저>를 비롯 4대 비극으로 불리는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등 37편의 희곡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