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될 행위로 보겠지만 지금의 어린 세대에게 이런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보고배우고 좋은 것을 즐기도록 한다는 의미가 많이 바뀐 것이다. 이제는 껴안을 수 있고 길거리를 걷다가 키스 할 수도 있다. 그것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
장면은 이 여자가 매우 현실적인 인물임을 알려 준다. ‘모든 사랑은 다 가짜로 밝혀지니까.’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이 여자가 어쩌면 과거에 이미 사랑으로 인한 숱한 상처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인물임을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한다. 어쨌든 이 여자는 ‘원래부터’ 사랑을 불신하는 인물이다.
사랑스런 교제에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의 원인이 헌신이 부족하다거나 지루한 예배 또는 반항적인 태도들에 있다고 진단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잘못 진단한 교회는 종종 영혼을 사로잡을 정도의 흥분 상태를 만들어내어 지속시킴으로써, 또한 인위적인 열심의 병폐를
그것을 반영한다.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없고 나의 마음조차 알 수 없는 이 현실 속에서 어차피 타인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진실을 은폐한다. 그리고 자신조차도 타인의 그 진실과 대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삼키고 또 삼키면서 자기 확인을 할 뿐
우리의 일상을 한번 되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언어로 상처를 받고 또한 언어로 위무를 받는가! 그것은 언어란 것이 심리 혹은 의식, 더 나아가 삶 자체이기 때문인 것이다.
언어는 사랑을 확인시키기도 하지만 파멸로 몰고 가기도 한다. 특히 연인간의 문제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율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