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머릿말
우리나라 도자기 문화에서 통일신라 토기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첫째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물리치고 정치적인 통합을 이룬 뒤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된 국가의 영토 내에 통일된 생산 기술에 의한 통일된 기종과 양식의 토기를 확산시켰다는 점이다. 통일신라는
월주요(越州窯) 청자 가운데에는 짐승을 본떠 만든 특이한 유물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유물도 그 중 하나로 위 부분을 높은 층상으로 만들어 누각이나 사람, 짐승 등을 붙였다. 신정호(神亭壺)라고 불리는 이 항아리는 무덤에 부장하는 명기(明器)로 후한(後漢)에 유행하던 오련관(五連罐)을 기원으로 한
월주요의 장인들에 의해서 중국식으로 지어진 것
황해도 배천 원산리 가마터, 순화3년淳化三年명문자료출토
순화4년명항아리, 이대박물관소장 (순화4년 = 993년)
고려청자의 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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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초기 중국 형식의 벽돌 가마 형태를 벗어나서
고려만의 진흙 가마 형식으로 바뀌었을까?
⇒ 중국 대륙과
월주요(越州窯) 등의 기술을 받아들여 신라 말인 9세기에 월주요와 유사한 청자를 완성, 세련시켰으며 백자도 생산하여 자기문화시대의 서장을 열었으나 그 외의 세계 모든 지역에서는 17~18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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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한국도자 略史
1.고려시대의 도자기
토기에서 자기로
신
월주요의 도자 장인들이 중국 각 지역으로 흩어져 각 지역의 청자 제작이 새롭게 시작되게 되었고, 이 무렵 전후에 고려에서는 청자를 제작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으므로 이들에게 후한 대접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월주요의 도자 장인들이 고려를 오갔을 것이며, 그들에게서 고려의 도기 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