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국권상실’의 위기상황에서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이라는 두 계열의 국권회복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의병운동은 위정척사계열의 보수 양반유생들과 민중적 입장에서 변혁운동 세력에 의해 확산되었다. 계몽운동은 위로부터 전개된 부르주아 변혁운동이었지만 이념을 달리하
이상룡(李相龍)·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재만동포의 농지개혁과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교육에 힘썼다.
1913년에 여준(呂準)·이탁(李#탁18) 등과 남만주의 동포 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민생교육과
이상룡, 월남 이상재, 우당 이회영 등과 만났다. 이회영은 이미 만석 재산을 독립운동으로 모두 써버린 뒤라 형편이 곤궁하기 이를 데 없어, 김창숙이 공원에 나가자고 청을 넣어도 입고 나올 옷이 없어 거동하지 못할 정도였다. 놀란 김창숙이 사정을 알아보자 이미 이틀을 굶은 상태라 하였을 정도였
이상룡이 국무령이 되어 서간도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서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다음 홍진이 선임되어 진강으로부터 왔으나 역시 내각조직에 실패하고 되돌아갔다. 이리하여 임정은 한때 정부 없는 상태가 되고 결국 김구가 국무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무
윤세복 종사,최 전, 강 우
국학 계열
무원 김교헌 종사,이 기,이상룡,박은식,신채호,유인식,안재홍,장도빈,정인보,정열모,최남선, 이유립
어문학 계열
장지연,유 근,주시경,김윤경,장지영,이윤재,김두봉,이극로,홍명희,안확(호:자산),안호상,최현배,이은상,이병기,이희승,현진건,류 렬(在北)
문화예술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