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의 독자성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경제·문화면에도 반영되어 독특한 양상을 자아냈지만, 대회관계에 있어서는 그 특색이 더욱 분명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체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최씨정권의 항몽투쟁은 바로 그것을 입증하여 주는 것이 된다. 다음에 이러한 특징을 들
서 론
고려의 무신난은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의 역사를 전·후기로 대별하는 분수령으로 이해되고 있는 데 그것은 의종 24년에 무신난의 폭발로 고려 사회가 크게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의 고려 귀족 사회의 제 모순이 축적된 결과 그 모순의 폭발이 원인이 되어 성립되었다. 왕권이 안정
918년 後三國을 통일한 왕건은 地方에서 독자적인 무력과 경제적 기반을 가진 호족들을 회유하여 자기의 기반 속에 흡수하려 하였다. 아직 확고한 勢力을 갖지 못한 고려왕조로서는 독자적 세력을 가진 豪族들의 지원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것이 호족들의 딸들을
최씨정권에서는 사병과는 별도로 삼별초를 조직하였다. 삼별초는 공병·사병적 요소를 동시에 가졌던 군사조직이었고, 대몽항쟁(對蒙抗爭)기 고려 군사력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삼별초는 원종 11년(1270) 국왕에 의해 전격적으로 해체되면서 대대적인 대정부·대몽고 항쟁을 펼쳤다.
삼별초는 은연중
서론
무신정권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문신귀족 정치의 누적된 모순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의 귀족사회는 분괴되고 새로이 무신정권이 성립되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러한 무신정권의 성립은 고려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