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를 사용했다.
② 식물 채집과 사냥, 어로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초기는 이른 민무늬, 덧무늬, 눌러찍기무늬의 토기가 제작되었고, 중기와 후기에 빗살무늬토기가 제작되었다.
③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농경과 가축 사육이 시작되었다. 후기에는 생산의 비중이 이전보다 늘었다. 유적은 부산 동삼
농경사회, totemism, 선민사상의 성립
* 단군신화의 의의 : 홍익인간의 건국이념,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정신적 지주
③ 고조선의 사회
* 8조법금 : 반고의 「한서지리지」에 3개 조항만 전함
* 8조법금에 나타난 사상 : 개인의 생명존중, 사유재산의 인정, 노예제가 존재하는 계급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볼 수 없음.
2)신석기 문화
(1)시기-기원전 6000년-기원전 2300년
(2)특징-마제석기와 빗살무늬토기 사용
(3)경제-초보적 농경의 시작
(4)사회-정착생활(움집이 전국에서 발견, 중앙에 화로,7-8명 거주), 부족사회 형성(부족의 유제; 경주중심 사로6촌의 공동체생활), 공동생산/공동
빗살무늬토기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는 계보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중국계 신석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퉁구스계의 종족이 채도문화와 농경문화를 수반하면서 만주로부터 이주하여 들어와 변형빗살무늬토기를 만들면서 계승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우리 한민족의 모체는 신석기
. 이때부터 농업이 시작되는데 따라서 농사를 지으며 한 곳에 정착해서 생활하게 되는 변화를 겪게 되고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고 한다.
탄화된 좁쌀의 발견(황해도 봉산군 지탑리)과, 이 당시의 유물인 빗살무늬토기는 당시에 이미 농경을 통해 수확한 곡식 등을 저장, 취사 하였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