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나 얼굴이 아름답고 글을 잘하는 부호의 아들 홍생이 있었다. 그는 8월 한가윗날을 맞아 면사를 사려고 친구들과 함께 평양장에 포백을 싣고 와서 강가에 배를 대었다. 성중에서 구경 나온 기생들이 홍생을 보고는 모두 그에게 추파를 던졌다. 김시습 지음, 이기종 역주, 금오신화,(혜원출판사, 2002)
포백으로서 모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예기』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황제 이후에 관례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광종 16년[966년] “16년 봄 2월 왕자에게 원복을 가하여 태자를 삼았다”
예종 3년 “신해에 왕태자가 원복을 수춘궁에서 가하니 백관이 표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우리나라
포백대로 돼서도 매듭을 짧게 매는
형식을 취해 활동하기 편리하게 했다.”
“고고학 연구자들은 ‘과대와 요패는 본래 기마 유목민들의
풍속이었던 것이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러한 것을 배운 모양이라고 주장.”
☞ 위의 주장들은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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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백을 하사한 기록이 있으며, 인종 17년(AD1138)에는 장애인에게 형법상 특혜를 주었고, 원종 9년(AD1308)에는 장애인에게 봉양인 한사람을 따르게 하였으며, 충렬왕 35년(AD1308)에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장애인에게는 그 소망에 따라 1명씩 봉양인을 따르게 하되, 그 봉양인에게는 각종 부역이나 병역을
서로가 원하는 재화의 종류 ·품질 ·분량, 또는 운반상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교환에 매개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서 원시화폐의 성립을 보게 되는데, 교환매개물로는 중국의 조가비 ·포백 에티오피아의 소금, 남아프리카의 가축, 시베리아의 모피, 뉴펀들랜드의 건조대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