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로(1471∼1503)는 무능하여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침입을 받자 이에 굴복하여, 시민들의 반발을 사서 추방되었다(1494). 메디치가는 1512년 피렌체로 복귀하여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를 배출하였다.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남하(南下)했을 때(로마의 약탈), 잠시 피렌체를 쫓겨난 메디치가는 얼마
⑤ 산 로렌초 세례당
393년에 세웠던 산 로렌초 세례당은 1426년 브루넬레스키가 메디치가를 위해 다시 지었다. 피렌체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 교회로 메디치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본당 회중석에 있는 직사각형 설교단은 도나텔로의 마지막 작품이다. 교회 정면 장식은 벽돌만 쌓여 있고 미완성으
피렌체에서 이탈리아 각 지역으로 확산이 된다. 건축가의 위치를 상승시켜주었다는 것은 메디치가는 자신들의 권력과 영광을 위한 메디치 드라마 탄생을 위해 르네상스의 문화예술의 강력한 후원자로 탄생했다는 것이 가장 합당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메디치 가문의 황금
Ⅰ. 서론
이탈리아는 통일을 이룩한 뒤에도 50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국가로서는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동안 국내에서의 지역간 격차, 사회 문화적 격차, 경제적 격차는 심각하리만큼 표면화 되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도시화가 진행되고 공업화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나, 이와는 대조
피렌체의 문화를 발전시켜간다. 1492년 로렌초가 사망하고 메디치가의 실질적 후원자였던 교황 인노켄티우스8세가 사망하면서 피렌체의 운명은 급변하게 되는데, 로렌초 데 메디치의 큰아들로써 정권을 잡았던 피에로 데 메디치는 실정을 거듭했고, 이탈리아를 노리고 있던 프랑스의 샤를8세가 나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