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시(閒適詩)나 자연시(自然詩)를 위하여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은 대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도연명의 시는 문장 면에 있어서도 그 시대에 있어서는 예외라 할 만큼 평이(平易)하다. 다른 그 시대의 시인처럼 아름다운 묘구와 대구, 또는 전고의 사용 등으로 화려하게 표현하는데 힘쓰지 않고 있는 그
한적 ․ 감상 ․ 잡률의 네 가지로 분류했다. 중국문학사, 김학주著, 신아사, 2001년 252p
그 중 풍유시는 백거이의 겸제 사상을 나타낸 시들로서 대부분 40세를 전후해서 지은 것들이다. 즉 36세에 한림학사, 이듬해 죄습유가 되어 궁중에 들어갔다가 44세에 강주사마로 폄적되었을 때까지 약 10년간
1. 시조의 정착과 성장
1) 왕조창건기의 시조
시조는 공식적인 기능이라고는 없으며 개인적이기만 한 노래이다. 악장이나 경기체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왕조창업의 칭송은 시조와 무관하고, 고려를 회고하는 시조는 거듭 이루어져 시조가 개인적인 노래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게 한다.
Ⅰ. 중당
중당(中唐 766~835)은 안사(安史)의 난 이후의 약 70년 동안을 가리킨다. 당대는 경제적 번영은 최고조에 달하는 중국 역사상 전에 없는 번영을 누렸던 통일 왕조였지만, 755년 안록산과 사사명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부터 급작스럽게 망국의 길로 치닫게 된다. 안사의 난을 겪으면서 그 동안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