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後三國)의 분열기였는데 935년 신라를 병합하였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하였다.
왕건은 935년 신라의 귀부(歸附)를 받고, 이듬해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태조는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해 국호를 '고려'라 하고 북진 정책을 추진해 서경(
지방에서 새롭게 나타난 부유층에 흡수되기도 하고, 유민이 되어 사방으로 생계를 찾아 흘러다니거나 무리를 지어 도적이 되었다. 정국 혼란으로 토지 제도와 수취 제도가 문란해져서 농민들에 대한 조세 부과는 점점 어려워졌다.
2절 호족의 대두
- 호족의 성장
농민들은 점점 집권층에 대해 실망하
고려라 칭한 점, 왕건의 사상과 정치이념이 담긴 십훈요를 제정한 점, 국가의 수도를 송악으로 정한 점,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을 중시한 점, 발해 유민의 귀순을 환영하고 거란과 적대관계를 유지하면서 북방정책을 추진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의 지방대립과 관계된 자료는 십훈요에 나타나
분열되었다. 즉 후삼국의 성립을 가능케 한 것은 지방호족세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는 후고려의 기반을 계승한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Ⅱ. 나말여초의 변혁을 주도한 6두품과 호족
1. 육두품
신라에는 골품제라고 불리우는 엄격한 세습적 신분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