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유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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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유로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영국과 유로화
과거 영국은 EU의 통합통화제도에 가입했었다. 하지만 왜 지금의 EU에 가입했음에도 유럽통화동맹의 유로화에 가입하지 않는 것일까?
영국은 1973년에 EEC(European Economic Community:유럽경제공동체)의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영국의 정치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80년대 말 영국의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친유럽주의자들과 반유럽주의자로 갈려 있었다. 1989년 10월 친 유럽주의자였던 로슨 재무장관의 사임 이후 재무장관이 된 사람은 후일 보수당 당수이자 총리가 된 존 메이저였다. 메이저는 반유럽주의자인 대처 여사의 정치적 제자였지만 친유럽주의자로 돌변, 대처 총리에게 ERM에 가입하라고 압력을 행사했다. 지지도가 떨어지는 가운데 15%에 이르는 고금리로 국민 불만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대처 총리로서는 금리 인하가 절실했다.
결국 영국은 1990년 유럽통화제도(EMS)의 환율조정체제(Exchange Rate Mechanism, ERM)에 가입하였다. 1979년에 출범한 ERM은 유럽단일통화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로, 일종의 고정환율체계였다. 영국은 1990년 10월 1파운드 당 2.95마르크의 환율로 ERM에 가입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대처 총리의 주장처럼 ERM에 가입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 지배적 분석이었다.
그 당시 유럽에는 유럽중앙은행이 없었다. 국가들 사이에 가상 법적 기준을 마련해 놓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모두 독일의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Bundesbank)의 통화정책에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은 막 재통일을 이룬 상태였기 때문에 동독의 재건에 막대한 돈을 써야했다. 이런 지출로 인해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분데스방크는 자국의 경기과열을 막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썼다.
분데스방크의 고금리 정책은 높은 환율로 인해 ERM에 가입한 듯 보였던 영국은 심한 불황에 시달리게 되었다. 국민들의 불만은 확산되고 있었다.
ERM에 가입하면서 영국은 파운드화 가치를 협약에 따라 1파운드당 2.95마르크로 유지했다. 느슨한 고정환율제를 채택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정환율제도는 국내 경제상황에 대한 독자적 통화정책적 대응이 불가능해 경제적 대가를 치를수 있었고 실질환율을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해야하는 부담이 국내물가에만 부과되었다. 만일 실패하는 경우, 경제적 비용이 매우 클 수 있었다. 또 느슨한 고정환율제도는 투기적 공격이 오는 경우에 특히 취약함을 보였다.
영국의 이 상황을 바라 보고 있었던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1930~ )는 곧장 행동에 나섰다. 소로스가 운영하는 퀀텀펀드는 150억 파운드를 빌렸고, 이 돈을 마음대로 달러로 바꿀수 있는 신용한도를 확보했다. 그 다음, 달러에 대해서는 롱포지션을 취하고, 파운드에 대해서는 쇼트포시션을 취했다. 그리고나서 공개적이고 시끄러운 공격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소로스는 파운드화 공매도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 했으며 각종 경제신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파운드화 절하가 임박했음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예상대로만 된다면 다른 투자자들의 파운드화 투매가 이루어 질 것이고, 그러면 영국 정부는 항복하고 평가절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롱포지션 : 매입포지션이라고도 하며, 선물이나 옵션시장에서 매입을 의미한다.
쇼트포지션 : 매도포지션이라고도 하며, 공매도라고도 불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