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는 듯한 글의 내용이 가끔은 짜증도 났습니다. 또한 소설책이나 줄거리가 있는 글의 내용이 아니라 마치 인터넷의 블로그 들을 다닥다닥 모아놓은 글이라서 한가지의 내용이 끝나버리면 다음 내용을 읽을 재미나 의미가 반감되었습니다. 특히 대중문화나 인터넷 글에서는 강준만 선생님의 의
멀리서 보는 듯한 글의 내용이 가끔은 짜증도 났습니다. 또한 소설책이나 줄거리가 있는 글의 내용이 아니라 마치 인터넷의 블로그 들을 다닥다닥 모아놓은 글이라서 한가지의 내용이 끝나버리면 다음 내용을 읽을 재미나 의미가 반감되었습니다. 특히 대중문화나 인터넷 글에서는 강준만 선생님의 의
잘 살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시적 대상으로서 자연을 경험적 현실로 인식하고 그것을 상상력의 세계 속으로 끌어올리는 형상성이이 뛰어나며 이별의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슬픔은 멀리서 밀려오고 고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꽃처럼 피어난다고 비유했습니다. 1997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멀리서 고향 후배가 왔으니 살면서 중요한 팁을 하나 주겠다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아가는데 학교에서의 공부는 중요하지 않아. 물론 그것이 바탕이 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전부는 아니야.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면 되는 거야. 쉽지는 않겠지만, 아직 어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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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보면 코미디다”라고 한 찰리 채플린의 말이 생각난다. 어쩌면 이 연극은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멀리서 바라보고 감상해야하지 않았나 싶다. 코미디물이지만 이 연극은 사실상 사회를 풍자하기 때문이다. 비록 일관성은 없었지만 연극에서 각 에피소드들마다, 그리고 캐릭터를 통해 이 사
멀리서 보는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시적 관점과 대비되는 거시적 관점이 간과한 개인의 능동적인 사고 과정과 행위의 선택 그리고 타자와의 의사 소통 과정에 주목한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감아 있어서 빠지면 안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나
멀리서 지켜보았다. 결국 늦어서야 구조대가 도착했고 그 ‘이름 모를’ 아저씨는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만 있을 줄 알았던 일이 나의 주변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나 역시 그때 무관심했던 군중의 한 사람 이라는 사실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언젠가 ‘방
멀리서 찍은 경복궁이 등장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감히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외국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기와집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람을 볼 기회가 있기는 한 걸까? 오히려, 내가 겪은 것처럼 콘크리트로 뒤덮인 서울의 마천루를 접해야 하며, 청바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라고 말하는 이순신이 가여웠다. 자신이 죽음으로서 임금이 안도한다는 것 나였다면 그런 임금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식까지도 참아야 하는 나라를 위해 그렇게 마지막까지 노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에 면과 여진의 채취를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는 이 아쉬움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로 달랬다. 그 장면을 연상하면서. 사실 예전에 <노인과 바다>를 읽었기에, <라이브 오브 파이>를 보면서 <노인과 바다>를 떠올려야 맞는 것인데, 영화를 보면서는 <노인과 바다>가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다시 읽기를 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