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파의 당, 군 장악과 당, 군 일체화
-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출범으로 새롭게 내각이 구성되었고, 연안계의 김두봉을 대신해 최용건이 취임을 하였다.
- 이후 1958년부터는 당 내 군부 숙청작업이 시작되었고 김일성은 군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였다.
- 1958년 3월 당중앙위원회
만주파가 장악. 군 행정요원이 다수인 소련계. 실제 군작전은 연안계가 담당.
- 6월 25일 로동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와 내각비상회의가 김일성 발의로 열려 남조선군의 공세에 반격을 명령하였고 이를 비준하는 회의라 설명. 전원찬성으로 전쟁 결정. 이 사실에 따르면 공식적 전쟁 결정과는 달리 별
만주파가 주도하여, 처음부터 지휘계통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제도적으로 군을 당의 통제 밖에 둘 수 있었다. 중국 공공내전에 참가한 조선의용군계의 조선인민부대가 이관되지만 하나의 무장투쟁 전통으로서 독자적인 소리를 내지 못하고 김일성의 무장투쟁에 의해서 대표될 수 밖에 없었다. 인민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5, 6장)
▶주요 내용
◆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 체제 확립(1958~1961)
1. 만주파의 권력 장악과 당의 ‘일원적 지도’ 체제
- 57년 11월 10월혁명 40주년 경축행사와 각구 꽁산당 및 노동당대표회의에 참석차 모스크바 방문. 이 회의에서 채택된 모스크바
만주파(최고수뇌부), 소련계(군행정요원 및 정보업무), 연안파(실제 군작전) 3계통으로 나뉘어짐
- 6.25 전쟁의 발발 경위에 대해서는 소련의 원조를 배경으로 한 북조선의 선제공격임이 소련측과 중국측의 자료공개 및 망명한 북조선 고위층의 증언에 의해 사실로 확인됨
- 김일성은 전쟁의 명분을 남
생각하였다. 김일성은 국내파의 반대론을 누르고 북조선분국의 설립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만주파와 기독교를 통합하여 조선민주당을 만들었다. 소련은 북조선에 친소 정부를 만들고자 했으며, 소련계와 연안계는 귀국하여 김일성을 지지하며 그를 당의 우두머리로 내세웠다.
만주파가 장악.
6월 25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와 내각 비상회의가 김일성의 발의로 개회 당시 내각 비상회의는 이미 기습 선제공격이 이루어진 후, 사후 정당화를 위한 절차에 불과.
,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은 ‘이 회의는 나의 반격명령을 비준하는 내각 회의다. 내각의 결정이 없으면 전쟁
만주파, 강화된 소련계, 새로이 참가한 연안계가 기존의 국내계에 대항하여, 김일성의 강력한 후원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945년 12월 17일~18일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 개회를 통해 김일성은 책임비서로 선출되어 당권을 장악할 수 있었으며, 당시 조직상황을 보면 기본적으로 각 도, 시군에 당위원회
만주파의 간부 등이 모여서 구성하였다. 소련 점령 당국으로서는 꼭 필요한 조직이었다. 이리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생겨났다.
1946년 김일성은 당뿐 아니라 정권의 정상이 되어 북조선의 모든 개혁을 자신의 이름 아래 실행해 간다. 그는 민족주의파와의 분열, 그리고 실질적인 단독정권의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