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하루키의 북조선 - 만주항일전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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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와다하루키의 북조선 - 만주항일전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북조선
와다 하루키는 책의 첫 장에 왜 그가 북한 연구를 시작하였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가 북조선을 이해하기 위해서 취한 방법은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눈앞의 북조선의 모습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 놓고 봄으로써 표면적은 관찰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고 그는 밝혔다.
그는 “김일성의 만주항일전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사상, 이데올로기의 알파요 오메가이다”라고 밝히며 김일성의 어린 시절부터의 역사를 훑었다. 김일성이 중학생 시절, 새로 부임해온 중국인 선생은 마르크스주의 청년문학가였고, 김일성은 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1931년 9월에는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시작되었으며, 만주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김일성에 의해 조직되고 이것이 김일성의 유격대였다는 것은 북조선 신화의 핵심이다. 이 전에 읽었던 여러 저작들의 저자들이 밝혔듯이, 만주항일운동은 지금의 북한이 있기까지 아주 중요한 사상적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주체사상의 파운데이션이라 할 수 있다.
만주항일운동을 궤멸시키기 위하여 철저하게 수사를 진행시키며, 1938년부터 유격대에 대한 진압작전은 아주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집단부락’에 농민들을 이주시켜 빨치산과 떼어놓는 작전을 쓰는가 하면, 투항자를 죽이지 않고 전향시켜 자신들의 빨치산 사냥에 쓰는 방침도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분산하여 ‘고난의 행군’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 와중에도 김일성 부대는 일본 토벌 부대인 마에다 중대를 전멸시키는 등 빛나는 성과를 올렸다. 이런 고난의 행군 끝에 김일성이 정착한 곳은 소련이었으며, 그는 이 기간동안 장남인 김정일을 유격대캠프에서 낳았다.
1945년 7월 소련 측으로부터 대일전쟁이 가까우니 정보요원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 있자, 항일연군을 만주로 가는 대원과 조선으로 가는 대원의 둘로 나누기로 결정하였다. 그에 맞춰 항련의 당조직도 둘로 나뉘었다. 조선으로 가는 조직은 조선공작단이라 불렸고 만주로 가는 신동북위원회도 있었다. 김일성은 조선공작단의 구성원 중 하나였으며,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조선에서 공작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김일성은 33세의 유격대 지휘관으로서 그때까지 그의 인생은 고통스러운 투쟁의 연속이었다. 일본의 가혹한 토벌작전을 견뎌내고 살아남아 60명의 부하와 함께 조국 땅을 밟았다는 사실은 역시 김일성의 비범한 능력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1945년 조선이 해방되었을 때, 소련은 조선 점령에 대한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김일성이 속해 있던 하바로프스크 가까운 야영에 있던 동북항일연군 제88특별여단 속에 조선인 집단이 있었다. 이를 알게 되자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확인을 하였다. 소련군은 공산주의자들의 힘이 조선에서 강한 것을 발견하고 이 힘에 의거하여 조선인 측에 행정을 맡겼다. 북조선 점령 방침에 관해서는 9월 20일 최고사령관 스탈린의 이름으로 지령이 내려졌다. 지령의 내용은, 소련이 점령한 북조선에 정권을 세우되, 그것은 공산당이 참가하는 정부여야 한다는 지시였다. 소련은 조선의 통일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 친소 정부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북조선의 공산당조직 중앙은 국내계를 주력으로 하고 소련군과 함께 온 소련계 사람들, 만주파의 간부 등이 모여서 구성하였다. 소련 점령 당국으로서는 꼭 필요한 조직이었다. 이리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생겨났다.
1946년 김일성은 당뿐 아니라 정권의 정상이 되어 북조선의 모든 개혁을 자신의 이름 아래 실행해 간다. 그는 민족주의파와의 분열, 그리고 실질적인 단독정권의 수립을 진행하였다. 김일성을 정점으로 연안계와 소련계가 장악한 공산당은 서울 중앙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장에는 김일성이 취임하였으며, 이로써 그는 당의 정점이자 정권의 정점이 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제일 처음에 실시한 것은 토지개혁이었고, 이미 우리가 봐왔던 것처럼 이는 급진적이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저자는 아주 급속히 진행된 방식이 만주의 해방구에서 실시했던 토지개혁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하며, 일본군이 다가오기 때문에 단기간에 토지개혁을 실행하여 농민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경험을 얻었고 그것이 여기서 실행된 것이 아닐까 보고있다고 하였다. 토지개혁과 동시에 사법제도 또한 정비되었으며, 개혁 후의 김일성의 권위와 공산당의 권위는 현저히 높아졌다.
1946년 11월 에는 선거를 통하여 북조선에서 정식 정부가 성립하였다. 임시인민위원회의 ‘임시’가 여기서 벗겨졌다. 이로써 더 한층 김일성 숭배가 고취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서울에서는 대한민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대한민국은 전 조선을 영토로 하는 조선의 유일한 합법국가라고 주장되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는 서울이 수도로 되어 있고 평양은 임시 수도이다. 따라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서울의 대한민국 정부는 왹구 힘으로 자국 영토에 세워져 있는 괴뢰정권이다. 논리적으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존재, 화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서로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상대를 부정하는 것이다. 분단국가가 된 후, 무력에 의한 상대 제거라는 국토통일 구상의 토대가 쌍방에 놓여 있었다. 이를 먼저 실행에 옮긴 것은 김일성이었다. 그는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