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序 論
모든 언어에 부동성이란 없다. 언어의 모든 부분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 변화의 주기는 일정하지 않아 30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도 크게 변화할 수 있다. 언어의 변화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기본 틀인 문법을 중심으로 그 문법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바뀐다. 그래서 언어를
年譜)」 정병욱, 「김시습(金時習) 연보(年譜)」, 『국어국문학 Vol.- No.7 [1953]』, 국어국문학회, 1953.
에는 김시습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밝혀져 있다. 또 출세에 고배를 마신 김시습과 달리 높은 벼슬을 구가한 동시대의 문인 서거정과의 비교 연구 또한 많이 있다. 「서거정과 김시습:조선 전기
年譜)에 박상(朴祥)이 48세(1521)에 "왕양명의 전습록을 변론한다"고 한 것이 있고, 김세필(金世弼)도 〈십청헌집 十淸軒集〉에서 "양명 노선생이 심학을 다스렸다"고 했으니, 이를 볼 때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는데, 양명연보(陽明年
年譜)에 박상(朴祥)이 48세(1521)에 "왕양명의 전습록을 변론한다"고 한 것이 있고, 김세필(金世弼)도 〈십청헌집 十淸軒集〉에서 "양명 노선생이 심학을 다스렸다"고 했으니, 이를 볼 때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는데, 양명연보(陽明年
年譜>에 의하면 신위의 호는 원래 홍전이었는데 관악의 자하동 별장에서 수학했으므로 호를 자하로 바꾸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버지는 대사헌 대승(大升)이며 어머니는 이영록(李永祿)의 딸이다.
서울 장흥방에서 출생하여 9세에 처음으로 학문을 시작하였으며 일찍부터 재주가 널리 알려져서 정조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