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명시하고, 일본보다 더 유리한 조건의 통상관계 성립하려 하였다.
㉠ 군대 주둔 : 형식적 종속관계에서 실질적인 속방 관계로 전환
㉡ 외교 간섭 : 마건충과 독일인 뮐렌도르프를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파견
4) 갑신정변
① 배경 : 이 시기에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청국의
신미양요(1871)
결과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 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 이용해 정변 일으킴. 새 정부 조직 및 군사권과 재정권 장악. 명성왕후의 도움요청으로 청-조선 연합군 파병 및 진압.
영향 주도세력들 일본으로 망명, 김옥균 암살.
한성조약[漢城條約] 텐진[天 津]조약 체결
체제와 같은 극빈 열악한 비인간적인 상태였다.' '한국인은 그대로 일본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보다 합병을 해서 세계 1등 국민으로서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100만 명이 넘는 일진회가 합방을 요청해 정치적 운동을 전개했고, 그것은 거대한 운동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정치와 한국외교사에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거문도사건과 주변열강의 역학관계 및 조선의 국가전략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현재를 가늠해보려 한다. 거문도 사건은 1895년 4월 15일부터 1897년 2월 27일까지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장기간의 다국적 철수외교를 통해 해소된 국제정치적 사건이었다. 임오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학살했으나, 반일 의병투쟁을 야기함으로써 더욱 수세에 몰렸다. 또한 1896년 2월 친러파에 의해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친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후 조선의 대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