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유교 정신까지 위협하고 있다고 느껴 공자를 유교의 창조자로서 추존하고 유교를 국교로 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 장에서는 아편전쟁 이후부터 5 4운동 이전까지 중국 현대 역사상 발생한 사건중 하나인 변법자강운동을 선택하여 그에 대해 설명하고 자신의 느낌과 평가를 작성하기로 하자.
자신이 담당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황제 광서제는 유폐되었고, 개혁파들은 숙청당했다.
강유위 등 몇 명은 보수파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으며 당사동 등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른바 무술정변이다. 무술 개혁이 시작된 지 103일 만에 개혁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개혁이 없이는 자강‧부강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팽배하게 되었다. 즉 중체서용론에 수정을 가하여 의회제도를 근원으로 하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장점을 君民共治라는 차원에서 채택하여야 한다는 변법사상이 호응을 얻었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이러한 변법사상을 기초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개혁운동을 말한다. 변법자강운동 (變法自彊運動)이라고도 한다. 1898년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이다. 변법자강운동의 배경은 청일전쟁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태도 전환 : 공업제품 수출을 넘어 자본 진출 목적으로 민족적 위기를 자각한 일부 지식인의 정치 변혁 시도하여 강유위를 이론적 지도
변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다시 올렸다. 모두 1만7,8천자에 이르는 상소문에 응시자 1천3백여명이 연서하여 집단으로 상소문을 제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公車上書(공차상서)」였으며 변법자강운동의 첫 출발이었다. 이때 강유위와 함께 개혁을 주장한 인물중 하나가 양계초였다. 그는 1873년 광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