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 명종 8년 6월 14일 기록에 보면 “경주(慶州)의 도적은 신들이 남에게 전해들은 소문이 아니고 모두가 확실한 일이므로 감히 아뢰었는데 그 방자한 형상은 매우 심합니다. 지난 정월에 어떤 경산(慶山) 사람이 경주 도적을 지목한 일이 있는데 한밤중에 도적이 그 움집에 들
2. 즉위 후의 탕평책
영조가 즉위한 것은 정치권의 안정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권을 혼란 속으로 빠지게 했다. 그것은 바로 영조가 붕당에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조는 세제책봉에서부터 노론 세력에 의해 추대된 것이기 때문이다. 노론의 정치권의 장악에 영조라는
중에 한 예를 들면,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기대승은, 선조 임금이 “장비(張飛)의 고함에 만군(萬軍)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正史)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삼국지연의(三國志衍義)〉에 있다고 들었다”며 소설 내용을 언급하자 불편함을 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이 지닌 소설관을 피력한다.
. 당시에는 고종·순종 실록이 CD-ROM으로 간행되기 이전이었기에, 모든 교육관계 기사의 조사는 태조에서 철종까지 정리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속연구로서 이번에는 조선시대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에 관하여 단순한 논의의 빈도뿐만 아니라, 그 내용까지도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