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 고구려는 고대 중국 영토 안에서 건국했으므로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중국 한나라 무제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되면서,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 이르는 곳까지 한사군(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었다
고구려가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의 고구려현 경내에서 건국되었으니 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고구려현 경내의 기타 변강 민족이 공동으로 건립하였고, 후에 옥저, 동예, 소수맥 등의 기타 예맥족, 한인, 선비인, 숙신인 등의 민족 성원이 더하여져 점차 융합하여 고구려 민족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구려정권을 구성한 민족은 여럿이었던 것으로 이들 민족의 원류 역시 모두 전한 시
고구려현(高句麗縣:玄娠郡의 屬縣)을 빼앗았다. 두곡동원(豆谷東原)에 묻혔다.
배경설화: 三年 7월에 離宮(이궁)을 골천에 지었다. 十月(시월)에 왕비 송씨가 돌아갔으므로 왕은 다시 두 女子(여자)를 繼室(계실)로 얻었는데 하나는 禾姬(화희)로 골천 사람의 딸이고, 하나는 雉姬(치희)로 漢人(한인)의 딸
고구려현)를 다시 무순(撫順)지방으로 옮기고, 107년에는 요동군의 고현(高顯) ·후성(候城) ·요양(遼陽)의 3현을 편입시켰고, 그 후 다시 망평현(望平縣)을 병합하여 모두 7현을 관할하였다. 그 후 현도군은 낙랑군과 더불어 184년 요동태수가 된 공손 탁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238년 공손씨가 3대만에 망하
고구려현은 이미 한조(漢朝)의 현토군에 속했다. 동한(東漢) 180년 동안 고구려는 모두 동한 왕조의 신하였다. 220년부터 426년까지 고구려는 중국 중앙정권의 신하로 예속돼 고구려후·고구려왕·정동대장군·영주사사(營州刺史)·낙랑군공(樂浪郡公)·낙안군공(樂安郡公) 같은 관직을 받았다.
남북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