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에 대하여 부여와 한사군 대립 한사군 모습 한사군 멸망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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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사군에 대하여 부여와 한사군 대립 한사군 모습 한사군 멸망과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사군
서론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가 대두되면서 우리 고대사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고자 각 방송사들은 이러한 성격의 드라마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그 역사적 타당성을 무시한 채 단순히 재미와 감동을 위한 드라마의 방향 설정은 오히려 고대사 인식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도 있다. 드라마의 최고 시청률이 50%를 넘었다는 것이 보여주듯이 드라마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특히 왜곡된 내용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은 드라마 성공에 비례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문제로 인해 드라마 주몽에 대한 허구적 내용을 비판하고 내용 보충을 위한 자료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이러한 것과 같이 하여 지금부터 우리 조는 드라마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사군에 대해 알고 보고자 한다. 드라마 초기 주몽에서 전반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한사군과 부여의 대립이며, 이는 드라마가 진행 되면서 부여, 고구려, 한사군 특히 현토군(현도군)과의 대립으로도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드라마 속 부여와 한사군 간의 대립은 실제와 어떻게 다르며 실제 한사군의 모습과 그 멸망과정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본론
1.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한 사군의 모습과 부여, 졸본의 대립
드라마 주몽에서 한 사군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회는 28회이다. 그리고 29회부터 33회까지 임둔과 진번지역을 공격하려는 준비과정과 전쟁장면이 나온다. 주몽은 그 내용을 간략하게 이야기 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몽과 대소는 태자가 되기 위해 서로 경쟁을 하기 시작한다. 대소는 이 경합에서 한나라의 초강법을 부여에 전수해 줄 장인들을 데려 오고 경합에서 앞서 나간다. 여기에 맞서 주몽은 조선의 유민들도 구하고 부여의 영토를 확장하는 목적으로 한 사군의 일부인 임둔과 진번지역을 공격한다고 금와에게 간청을 한다. 그리고 주몽의 마음을 이해한 금와는 전쟁준비를 위해 박차를 가한다. 중간에 사출도의 군사 출정 거부 등의 사건이 있었지만 결국 대소가 한나라의 모략에 빠져 사출도 군사 출정 거부계획이 물거품 되고 부여는 옛 다물군과 부여군으로 임둔, 진번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또한 43회에서는 부여와 한 사군(임둔, 진번)간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현도군 태수 양정이 임둔, 진번을 낙랑에 편입시키려는 이야기를 대소에게 이야기 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 장면에서 양정은 대소에게 지난번 전쟁에서 옛 조선의 유민들이 부여로 많이 도망갔기에 그 유민들을 색출해 한나라로 압송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69회부터는 주몽이 다물군을 이끌고 현도군을 축출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주몽의 도움으로 졸본을 통합한 소서노는 주몽과 함께 한나라 현도군을 치려고 하고 부여는 한나라와 연합해서 졸본을 막으려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70회부터 한나라 현도군과 졸본의 전쟁이 그려지고 71회에는 현도 태수 양정을 생포하게 되고 주몽은 양정에게 목숨을 구할 기회를 주지만 양정은 목숨을 구걸을 하지 않겠다고 하며 결국 죽게 된다. 이로써 주몽은 현도를 축출하고 그 지역을 손에 넣게 된다.
2. 한사군이 설치된 시기와 위치.
위씨조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한 무제는 육로군(陸路軍) 6만을 요동에서 평양으로 남진케 하고, 7천의 해병으로써 산둥반도에서 대동강으로 상륙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한제국은 1년여 동안에 이러한 작전을 구사하여 기원전 108년에 위씨조선을 정복하였다. 한은 위씨조선을 정복한 그해에 낙랑군(樂浪軍), 진번군(眞番軍), 임둔군(臨屯軍)을 설치하였고, 다음해인 기원전 107년 현도군(玄軍)을 두어 소위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다수의 사학자들은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 위씨조선 지방에, 진번군은 자비령 이남 한강 이북의 옛 진번 지방에, 임둔군은 함경남도의 옛 임둔지방에, 현도군은 압록강 중류 동가강 유역의 만주 집안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현재 통설을 이루고 있다. 그러지만 동옥저 조의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구려(句麗)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지금의 소위 현도 고부가 이곳이다”라는 기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기사에 유의하여 현도군은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함흥평야에 이르는 교통로를 따라 동서로 길게 설치된 회랑(回廊)형이라는 설이 제기 되었다. 한사군은 각기 그 지방으로부터의 저항에 직면하여 기원전 82년 즉, 약 25년 만에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되고, 그 관할 하의 여러 현이 각기 낙랑군과 현도군에 귀속되었다. 기원전 75년 다시 7년 만에 현도군은 토착세력의 거센 저항을 받아 요령성의 영릉(永陵)진 일대로 옮겨갔는데 이것이 제 2현도군이다. 그 후 무순방면으로 다시금 옮겨간 것을 제 3현도군이라고 한다. 후한 말에 들어서, 204년 요동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을 펴고 있던 공손씨(公孫氏)는 낙랑군의 남부에 위치한 옛 진번 땅에 대방군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 목적은 토착 한예세력이 강성하여 낙랑군이 통제하지 못하자 그것을 강화시키려는 데 있었다. 이렇듯 낙랑군은 토착세력의 저항을 받아 약화되고 있었다. 마침내 313년, 고구려에 의하여 낙랑군이, 이어 백제에 의하여 대방군이 소멸되었다.
한사군의 위치는 국사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주제이다. 일부 국사학자들은 한사군이 한반도 외부에 주둔했다고 본다. 그들은 일본 사학자들이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라고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일본사학자들이, 이러한 조작을 사실로 만들기 위하여, 한사군의 유물을 한반도 외부에서 가져와서 마치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처럼 꾸몄다고 주장한다.
3. 현도군
현도군의 속현은 고구려 ·상은대(上殷臺) ·서개마(西蓋馬)의 3현에 4만 5006호(戶), 22만 명으로 《한서》에 나타났고, 나머지 현도군의 고지는 본주민에 돌아가 이 지역은 여러 부락으로 나뉘어 얼마 동안 자치를 계속하다가 여기에서 고구려가 일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하게 되었다. 고구려 태조왕 때에 이르러 현도군은 증강한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제2의 군치(신고구려현)를 다시 무순(撫順)지방으로 옮기고, 107년에는 요동군의 고현(高顯) ·후성(候城) ·요양(遼陽)의 3현을 편입시켰고, 그 후 다시 망평현(望平縣)을 병합하여 모두 7현을 관할하였다. 그 후 현도군은 낙랑군과 더불어 184년 요동태수가 된 공손 탁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238년 공손씨가 3대만에 망하자 위(魏)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후에 다시 서진(西晉)에 속하게 되었다. 《진서(晉書)》 지리지에는 이 당시의 현도군은 ‘통현(統縣) 3, 호(戶) 3,200’이라 하여 그 세력이 크게 축소되었음을 나타내는데, 이전의 7현 중 서변(西邊)의 고구려 ·망평 ·고현 등 3현만 남고, 동변(東邊)의 상은대 ·서개마 ·요양 ·후성 등 4현은 이미 고구려의 판도에 들어간 듯 제외되어 있다. 319년 이후 현도군은 요동군과 더불어 모용씨(慕容氏)의 연(燕)나라 치하에 들어갔다가 광개토왕 때 고구려가 쟁취함으로써 한사군의 마지막 국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