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는 중세시대의 또 다른 어두운 역사의 흔적이다. 위안부 사냥꾼들에게 식민지시기의 여인들이 잡혀갔다면, 고려?조선
시대의 여인들도 공녀사냥꾼들의 마수에 걸려들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수천명의 어리고 아리따운 처녀들이 원?명?청나라 땅으로 끌려갔다. 낯설고 물설은 타국으로 끌려가지 않
공녀를 보낸 기간 및 횟수
- 공녀이외의 다른 여성들…
3)조선후기 청에 대한 공녀
- 청나라의 공식적인 요구
->혼인을 이유로 헌납 요청->거리상의 이유로 헌납 정지
- 효종때 청이 혼인을 위한 헌납 요청
->왕의 친척 및 대신의 딸 요청
3. 공녀의 선발과정과 폐단
1)공녀의 선발과정
- 중국에서 사
공녀는 공민왕의 반원정책(反元政策)으로 끝났으나 대신 명(明)나라로 그 상대국이 바뀌었을 뿐 계속되었다. 명나라에서는 원가 같이 공녀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원나라사람과 혼인하여 살고 있단 충혜왕의 딸 장녕공주(長寧公主)를 공민왕의 요청에 의해 돌려보내주기도 하였다. 공민왕은 이의 보답
1.요약
1) 중국과의 조공외교 관계
삼국시대 이래 한국과 중국과의 외교관계는 조공외교를 특징으로 하였다. 한, 중 간의 조공관계는 삼국시대 초기인 기원 후 1세기부터 조선시대 말기인 갑오개혁 때까지 약 2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공녀문제도 결국은 조공관계와 불가분의
공녀로 갔다가 황후가 된 기황후 일족들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충선왕과 충목왕의 개혁은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충선왕은 전반적인 관제개혁을 단행하여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을 설치하였고, 충목왕은 정치도감을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수행하였는데, 이 개혁을 주도한 사람들은 과거를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