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와 환향녀의 개념

 1  공녀와 환향녀의 개념-1
 2  공녀와 환향녀의 개념-2
 3  공녀와 환향녀의 개념-3
 4  공녀와 환향녀의 개념-4
 5  공녀와 환향녀의 개념-5
 6  공녀와 환향녀의 개념-6
 7  공녀와 환향녀의 개념-7
 8  공녀와 환향녀의 개념-8
 9  공녀와 환향녀의 개념-9
 10  공녀와 환향녀의 개념-1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공녀와 환향녀의 개념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공녀
1-1. 공녀의 정의
1-2. 원의 대한 공녀(고려시대)
1-3. 명의 대한 공녀(조선 전기)
1-4. 청의 대한 공녀(조선 후기)
1-5. 기황후
1-6. 고자의 헌납

2.환향녀
2-1. 환향녀의 정의
2-2. 환향녀의 대우
2-3. 일본의 의한 종군위안부
2-4. 이라크판 환향녀

본문내용
1-1. 공녀[貢女]의 정의
원(元), 명(明), 청(淸) 나라의 요구에 따라 조선왕조가 조공품으로 바치던 여자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로 관계를 갖게 된 이후. 몽고는 고려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고 과다한 공물을 요구하여 왔다.
이러한 때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피살되자 두 나라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1231년 (고종 18)년부터 1258년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몽고의 고려 침입이 여러차례 게속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몽고를 완전히 격퇴할 수는 없었지만 군사적으로도 굴복하지 않아 두 나라 사이에는 화평의 교섭이 진행되고 고려는 몽고의 부마국(鮒馬國)으로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몽고는 화평의 조건으로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500명 내지 1000명을 요구하였고 고려가 몽고에 항복한 후에도 여러 구실로 많은 수의 공녀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의 표면적 이유는 중국대륙을 통합하여 원나라를 세운 후 항복해 온 많은 군사들에게 배우자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고려 여자에 대한 야욕의 충족과 고려를 무기력하게 하여는 술책이 숨어 있었다. 고려에서는 등 특별 관청을 설치하여 여자를 징발하였고. 1275년(충렬왕 1)부터 공민왕 초기에 이르기까지 원나라로 보낸 처녀진공사(處女進貢使)의 왕래 횟수는 50회 이상에 이르렀다. 몽고족을 야만족으로 보는 고려 여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아 역적의 부인이나 파계한 승려의 딸로 충당하는 일도 있었고, 충렬왕 때는 온 나라 안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처녀등록제를 실시하였다. 공녀는 주로 13~16세까지의 처녀를 대상으로 징발하였으므로 이 연령의 처녀를 가진 집안에서는 금혼령이 내리기 전에 미리 혼인시킴으로서 10세가 되면 혼인시키는 조혼(早婚)의 풍습과 데릴사위 등의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한편 미리혼인하지 못한 처녀 중에서는 원나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중이 되거나 목숨을 끊는 등 그 폐단이 많았다.
원나라로 간 여자들 중에는 노비로 전략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궁녀와 제왕후비(帝王后妃)의 시중을 들게 되었고, 그들 중에는 원나라 최후의 황제인 순제(旬製)의 제2황후가 된 기자오(奇子傲)의 딸 기황후(奇皇后)와 같이 권세와 영화를 누린 경우도 있었다. 고려여자들이 원나라의 왕실에 가득하여 고려의 의복.음식 등이 퍼져 고려풍(高麗風)이 유행하였고, 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으며 고려떡, 고려만두 고려아청(高麗鴉靑) 등을 즐기게 되었다. 또한 고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귀족․고관으로서의 체면이 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원나라에 대한 공녀는 공민왕의 반원정책(反元政策)으로 끝났으나 대신 명(明)나라로 그 상대국이 바뀌었을 뿐 계속되었다. 명나라에서는 원가 같이 공녀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원나라사람과 혼인하여 살고 있단 충혜왕의 딸 장녕공주(長寧公主)를 공민왕의 요청에 의해 돌려보내주기도 하였다. 공민왕은 이의 보답으로 1373년(공민왕 22) 공녀를 명나라 황실의 궁녀로 보냈고 이때부터 조선시대까지 명에 대한 공녀가 계속되었다. 명나라 태조(太祖)는 조선 여자 한비(韓妃)를 맞아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고 또 석비(碩妃)도 조선여자로서 영락제(永樂帝)를 낳았다. 명나라는 1405년(태종 8)부터 1521년(중종 16)까지 10여 차례 공녀를 요구하였으나 1521년 조선에서 하등극사(賀登極使) 홍숙(洪淑)을 보내 공녀의 폐지를 인정받았다. 그 후 청(淸)나라가 세워지면서부터 직접적인 공녀의 요구는 사라졌다. 공녀는 한국의 조혼풍속의 연원(淵源)이 되었다.

하고 싶은 말
잘정리된 좋은 자료이니 믿고 구입하셔도 됩니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