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중에서 학생운동 지도부의 미숙한 경험과 인식의 한계로 나타난 ‘서울역 회군’사건 이후 신군부에 저항할 수 있는 조직화된 세력 혹은 집단적 역량은 실질적으로 부재한 상태였다. 그 결과 기나긴 암흑기에서 깨어난 민주화의 열망은 신군부에 의한 5․17쿠데타로 인해 강제적으로 중단되었다.
제의 확립을 원하는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국가권력구조를 승계하고자 하는, 곧 현상유지를 원하는 세력이다. 이미 1979. 12. 12일의 군부개입 사태는 후자의 가능성을 암시해 주었다. 국가권력을 둘러싼 투쟁이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로 구체제 아래 특권을 누려온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이
전두환신군부세력의 주장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한편 신군부세력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대통령을 허위로 억지 설득시켜 1980년 5월 17일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전국 모든 대학교를 강제로 휴교시키고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군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다. 당시 전두환은 중
월 17일 신군부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5월 27일 계엄군을 광주(光州)에 투입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발족되고,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 10월 27일 제5공화국헌법이 공포되었다. 12월 초 민주정의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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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함.
군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기도 하는 등 유신잔재 청산에 미흡한 모습을 보임.
가장 결정적으로 제 5공화국은 쿠데타로 성립된 군사독재정권이라는 점이 있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제 5공화국은 반민주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