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는 총 사령관이었다가 후에 프랑스의 3대 대통령이 됨.
이 바젠군을 구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세당에서 참패했다. 프랑스군은 전부터 수세에 몰려 있었는데 8월 첫 주 독일군에게 계속 패하자 프랑스군 사령부는 크게 당황한 상태에 있었다. 라인 주둔군이 메츠에서 베를린으로 후퇴함
비스마르크는 달랐다.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해외 진출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이를 조건으로 다른 열강들, 특히 영국과 관계를 원활히 하여 프랑스를 고립시켜 독일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영국이 독일과 대립
문제를 다루는 비스마르크의 정책의 두 가지 특징을 비추어 볼 때, 비스마르크가 의도한 독일 통일은 오스트리아를 능가하는, 적어도 오스트리아와 동등한 지위에 있는 프러시아가 주도하는 독일의 통일이었고 그보다 중요한 건 국제질서에 있어서 현상의 유지(안정과 질서)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전쟁 중의 결전의 하나
남(南)이탈리아의 칸나이에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5만의 병사를 이끌고 8만여의 로마군에게 쾌승을 거둔 전투.
열세의 병력으로 우세한 병력을 포위 ·섬멸한 전례(戰例)로서 유명
→ 슐리펜작전의 이상
1. 영국과의 식민지 경쟁
-보불전쟁 이후 독일의 국제
여러 가지 위협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유럽협조체제의 주도 국가 각각이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가는 유럽협조체제가 성립되고 운영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와해의 위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