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로 할지가 문제로 올라왔습니다. 탈해와 노례는 서로 양보했고, 결국 떡을 물어서 잇자국이 많이 난 사람이 왕이 되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노례가 더많았고, 잇자국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인 이사금을
칭호로 하여 유리 이사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탈해는 왕에 올라 4대 탈해 이사금이
됩니다.
“삼국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의 통일에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사실은 삼국 통일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삼국통일은 민족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고구려, 백제 문화 전통의 수용과
신라사회의 질적 변화는 4세기부터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중고기(中古期)라 삼국유사에서 칭하는데 법흥왕 대부터 진덕여왕까지의 140년을 일컫는다. 중고기에 완성되는 고대 국가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이다. 율령의 반포와 불교의 공인 등으로 신라는 중앙집권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