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참전시킬 경우 국민당의 도발이 예상될 수 있다는 점, 또한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공군과 해군에서 열등한 상태로 전쟁에 임하는 부담, 마지막으로 원자폭탄에 대한 두려움 등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생각은 달랐다. 육군의 경우 중공군이 병력과 질적인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
26일 일부 부대가 압록강변에 도달했다.
제3단계
1950년 11월부터 1951년 7월 휴전회담을 개시하기까지의 기간으로 북한군의 붕괴로 UN군에 의한 북한 전 지역의 점령이 임박하게 되자 대규모의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압도당한 UN군은 북한
중공군이 개입한 1950년 12월에는 유엔총회가‘정전 3인위원회’를 설치하여 중공에 대해 38도선 이남으로 침공하지 않도록 요청하면서 평화를 회복시키려 노력하였다. 한국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할 위험성을 우려한 인도 및 영국은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해 노력했고, 중공을 승인하고 대만 대신 중공
한국의 분단을 현실이 되었다.
2. 분단한국과 이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입장
1) 미국
미국의 대외정책의 특징은 크게 고립주의(Isolationism)와 개입주의(Interventionism)의 순환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들 내부의 문제가 강조될 때에나 국력이 약하다고 여겨질 때에는 고립주의 정책을 천명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