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은 전황이 불리해 질 경우를 대비해서 한국전쟁 참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 과정에서 미군과의 전면전이 일으킬 상황에 대해 많은 걱정이 있었고 특히 미군의 막강한 공군력과 원자폭탄은 가장 큰 경계 대상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뚱은 군대의 수량, 부대의 질에서 중공군의 우세를 주장하며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압도당한 UN군은 북한으로부터 철수해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또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길어진 병참선에 미국 공군의 강렬하고 지속적인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공군은 공세가 크게 둔화되어 UN군은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UN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전이 아니라 UN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하였다. 인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북한과 남한의 전면전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맺을 때까지 계속된 전쟁이다. 이로 인해 양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남한과 북한은 아직까지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서류상 휴전중이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주로 이를
1) 남북한의 대외 관계
한국전쟁 발발 이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1945년 미소의 분할점령으로부터 비롯되지만, 외교관계의 측면에서는 1948년 남 북한 분단정부 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국제관계는 분단정부의 태생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졌는데, 미국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