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개입을 통한 두 나라간의 충돌이 가시화되었다. 마오쩌뚱은 간부회의에서 미국의 군사력과 중국의 군사력의 역량을 비교하며, 미공군력의 우세와 원자폭탄 투여 위험성 등을 들며 참전 결정을 반대하는 의견들을 무릅쓰고, 동지 북한을 도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따라서 중공군의 한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압도당한 UN군은 북한으로부터 철수해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또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길어진 병참선에 미국 공군의 강렬하고 지속적인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공군은 공세가 크게 둔화되어 UN군은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UN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전이 아니라 UN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하였다. 인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1) 남북한의 대외 관계
한국전쟁 발발 이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1945년 미소의 분할점령으로부터 비롯되지만, 외교관계의 측면에서는 1948년 남 북한 분단정부 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국제관계는 분단정부의 태생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졌는데, 미국과
전쟁 무기, 교전 지역, 참여 국가 등에 제한을 둔 제한전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미국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한국전쟁을 제한전으로 치루기 위한 전략을 펼쳤다. 즉, 원폭의 사용을 금지하고, 전쟁이 중국 영토로 확전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소련이 전쟁이 직접 개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