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으로 거두는 행정을 삼정이라고 하였는데, 관리의 부정으로 삼정이 크게 문란해졌다. 삼정의 문란으로 세금 부담이 늘어나자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 졌다.
조선시대 철종 13년,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은 겨우 목숨만 이어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주의 백낙신이라는 관리가
농민은 유랑하게 되었다. 고향을 버리고 산적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국에 큰 흉년이 든 1811년(순조 11) 홍경래란을 기점으로 1862년까지 70개 군 이상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으며, 1863년 2월에 일어난 진주민란은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견디지 못한 농민의 대표
농민들은 그들 자신의 모임을 만들었다.
1862년 단성민란이 발생했고, 진주민란에 의하여 분개한 농민들은 3달 이상 삼남지역을 중심으로 중부‧북부지역에 발생했다. 농민들은 관아를 공격하여 관아건물을 부수고, 수령에게 죄를 물었다. 세금을 횡령하거나 핍박하는 지방 관리들을 죽이고 그들의 가
봉기 이후에도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계속되면서 철종 때는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 가혹한 수탈을 이기지 못하고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봉기가 이어졌다. 임술 농민봉기는 1862년(철종 13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을 총칭하는 말이다. 임술 농민봉기(1862) 단성에서 시작되어 진주를 중심으
농민봉기는 경상도 진주에서 처음 발발한 이래, 전라도, 충청도 등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70여 군현에 퍼지며 전국적인 농민봉기로 확산되었다. 진주농민항쟁은 진주목의 도결과 경상우병영의 환곡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진주 목사는 장부상에 부족한 곡식을 채우기 위해 토지 1결당 6냥 5전씩 받아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