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자는 미용(美庸), 용보(頌甫), 귀농(歸農)이고, 호는 삼미자(三眉子), 사암(俟庵), 열수(洌水), 다산 (茶山), 자하도인(紫霞道人), 태수, 문암일인(門巖逸人) 등이며, 고향집의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다산의 고향 마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하고 다시 경안천이 흘러
다산의 자는 미용(美庸), 용보(頌甫), 귀농(歸農)이고, 호는 삼미자(三眉子), 사암(俟庵), 열수(洌水), 다산 (茶山), 자하도인(紫霞道人), 태수, 문암일인(門巖逸人) 등이며, 고향집의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다산의 고향 마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하고 다시 경안천이 흘러
천주교 박해를 위한 신유사옥으로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1818년 풀려날 때까지 오직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여 경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한 주석서와 정치, 경제에 대한 개혁을 구상한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다산은 18년간의 전남 당진에서의 유
되기도 하였다. 정조가 승하한 후 천주교 박해를 위한 신유사옥으로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1818년 풀려날 때까지 오직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여 경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한 주석서와 정치, 경제에 대한 개혁을 구상한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되기도 하였다. 정조가 승하한 후 천주교 박해를 위한 신유사옥으로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1818년 풀려날 때까지 오직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여 경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한 주석서와 정치, 경제에 대한 개혁을 구상한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