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 문제로 사이가 갈라져 일생을 두고 구부간에 화합될 수 없는 정치적 대결을 벌이게 되어 생애 후반 정치적 노선이 변화무쌍하여 남달리 정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881년 전국유림의 척사상소운동이 벌어졌을 때 안기영의 국왕폐립음모에도 간여하였고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그는 입궐하
조대비에게 접근, 1863년 12월초 철종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명복이 12세에 고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하여졌으며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요람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며, 밖으로는 침략적 접
당시 정계를 주도한 인물로는 대표적으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를 거론할 수 있겠다. 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그간의 국내외 많은 선행연구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의 이해의 틀이 정립되어 있지만,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이해가 대부분이거나 단편적이고 또한 허구성이 강한 소수의 기술이 있
한국의 근대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었다. 조선 시대 말부터 국운이 기울어 일제에게 국토를 강탈당하기 전까지 조선의 정치를 이끌어 간 것이 이 둘로 대표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명성황후는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했고 흥선
군의 건국 : 「삼국유사」「제왕운기」「세종실록지리지」「응제시주」「동국여지승 람」에 건국신화 수록
* 단군신화를 통해 본 고조선사회 : 제정일치의 사회, 농경사회, totemism, 선민사상의 성립
* 단군신화의 의의 : 홍익인간의 건국이념,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정신적 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