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를 잡고 전권(專權)을 휘두르는 부정적 정치형태인 홍국영(洪國榮) 이후의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지칭하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심화되면서 그의 중압을 받아 일반 국민의 사기가 날로 저하되고 동요되기 때문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7 : 서세동점과 문호개방」(2000) 211p~213p
대원군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서울시민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대외적으로 강경한 쇄국론자였던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 때 외세에 단호하게 맞섰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면서 흥선대원군은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1882년 임오군란 직후 한 달간 그리고 1894년 동
1단원 한국사의 바른이해
1.1 역사의 의미
역사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history as past)와 기록으로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추천한 민치록의 딸-민아영은 8살에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 대원군이 가장 경계하는 세도정치의 발호를 예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왕비로 간택된 16살의 민아영은 이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지만 이들의 숙명적인 악연이 이에서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