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제국이 수립되고, 15년에 걸친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주의적 실험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모든 정치조직과 사회집단 그리고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투쟁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제 국가와 민족, 독일인들의 ‘토지와 피’를 위해 싸우는 나치스가 집권하였다. 권형진, 『독일사 』,
늘어나자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불환지폐를 발행하였다. 또한 승전국들에게 많은 배상을 지불해야 했기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 그리고 연합군 측은 이 채무를 경감시켜 주었다.
‘황금의 20년대’는 바이마르 시대의 문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패전으로 고통 받던
독일의 경우 자연 후자의 입장이 지배적이 되어 당시 저명한 작가들이 집필한 시나리오 모음집이었던 영화책(1914)는 기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 일색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프라하의 대학생>(1913)이나 <골렘>(1914)과 같은 영화들이 제작되었고 이런 영화들은 영화에 대한 독일적 입장을 반
제 질서의 원리는 '세력균형' 이었다. 이 회의 결과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시작된 사유와 국민 운동은 억압되었다. 메테르니히는 독일의 자유와 통일을 요구하는 학생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때 독일 청년들을 지도할 인물로서 헤겔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기본권 문제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 핵심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Metternich)였다. 1814, 1815년의 비인 회의에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등 옛 군주국들이 대부분 복구됨으로써 유럽은 반동복고적인 질서로 개편되었다. 이것은 독일인들의 소망인 자유롭고 통일된 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