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독립군의 창립
일제가 만주침략을 자행한 1931년 9월 18일 당시 동북변방군 사령관 장학량의 군대는 일제 관동군보다 숫 적으로 우세하였다. 그러나 장학량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쟁 회피 소극적 대책에 동의하여 처음에는 무저항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1932년 만주국을 세우자 만주군
동경성 신축 현장에서 향년 71세로 숨을 거둔다. 이후 발해국은 14대 227년동안 만주를 지배하다가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게 멸망한다.
대조영 장군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으며, 특히 천문령 대첩을 통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양만춘의 안시성 대첩과 함께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동경성을 중심으로 약 4천여 명의 조선족이 거주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에 조선북방의 6진(무산, 종성, 회령,경원, 온성, 경흥)에 심각한 재해가 발생하여 농민들이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조선의 빈곤한 농민들이 대대적으로 넘어오자 청조의 지방관리들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1869년에 이르
며칠 전이었던 4월 11일은 우리나라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간만에 할아버지 묘에 다녀왔다. 물론, 그날이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전에 우리 할아버지는 독립군(학도병 출신)이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독립군이었다는 것을